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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은 반가운 마음으로 로비로 내려가 그녀를 만났다.

혜린은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연기자였다.

혜린아, 정말 예뻐졌구나! 나 여기 있어도 너 나오는 드라마는 한편도 안 빼고 다 본단다.

어쩜! 그렇게 하나도 안변했니? 너는 세월을 거꾸로 먹고 있구나? 아무튼 반갑다. !”

채린은 호들갑을 떨어가며 혜린을 부추기는 말만 되풀이 했다.

서울에서 혜린이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매니저 겸 물주를 잡아 주던 언니였다.

수완이 좋기로 소문난 여자였고 그녀의 손만 거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처리되었다.

채린이 강남에서 제일 큰 나이트클럽과 영화사를 오픈하면서,

혜린이 연기생활로 벌어놓은 모든 재산을 다 쏟아 넣고, 정여사 일에 관여되어

필리핀으로 도망치다시피 달아난 이후혜린은 그녀가 벌려 놓은 사업체를 정리하며

많은 채무를 뒤집어쓰고 그 빚을 갚느라 수년간 많은 고생을 했었다.

혜린으로서는 그때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채린을 따라 호텔 로비로 나서자,

우람해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다가와 고개를 굽실거리며 움직임을 주시했다.

혜린이 낯선 사내들의 출현에 약간 머뭇거리는 동작을 취하자 이를 지켜보던 채린이 반색을 하며,

어머! 혜린이가 놀랐는가 보구나? 혜린아! 마닐라의 밤은 무서운 도시야!”

현관 입구에는 검정색 벤츠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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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이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며 차의 뒷문을 열어주었다.

채린은 혜린에게 손짓으로 차에 타도록 권했다.

그녀들이 차에 오르자 호텔 출입구를 벗어나 네온사인이 즐비한 도심지를 달라고 있었다.

채린은 예전부터 앙드레김의 옷을 특별히 좋아해서

철이 바뀔 때마다 여러 벌의 옷들을 맞추곤 했다.

채린은 혜린의 작은 손을 꽉 쥐며,

, 지금 언니 옷보고 있었지? 속으로 참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혜린은 호호 웃으며

언니는 쪽집게네? 내 속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말이야, 옷이 참 멋있다.

, 있잖아 앙드레김 선생님이 늘 쓰시는 멘트어우좋아~엘레깡~스해~.”

혜린이 앙드레김의 흉내를 내자 채린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십년 전에도 한국에서 지방촬영 시장거리 여행을 할 때마다

채린과 혜린은 앙드레김 오빠의 흉내를 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그 만큼 채린과 혜린에 있어 앙드레김은 언제나 친근한 스승이자 벗이었다.

넓은 주택 앞에 멈추어 섰다.

정문 입구는 굵은 아치형의 철책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입구 바로 옆 수위실 안이 훤히 드려다 보일 정도로 밝은 불빛이 켜져 있었다.

그 안에는 몇 명의 건장한 사내들의 모습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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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수가 차창을 열며 펼리핀어로 말하자 사내들은 차안에 있던

채린을 힐긋 바라보고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예의를 표했다.

사내들은 채린과 혜린이 차에서 내리자 현관 쪽으로 둘을 안내했다.

거실 안은 웅장한 로비와 벽을 따라 즐비하게 진열 되어있는 시대를 알 수 없는

그림들과 조각품들이 조화롭게 갖추어져 있었고, 벽 한가운데 중앙에는

군복을 입은 사내의 위엄스러운 표정을 지은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런 분위기외는 달리 채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실내를 자유롭게 활보했다.

혜린은 넓은 소파에 앉아 하인들이 내온 자스민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차를 마시며

궁금증이 더해져 채린에게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언니! 누구네 집이야? 궁금해 죽겠어, 불편해!”

채린은 가벼운 웃음으로 대꾸했다.

너를 좋아하는 분이셔, 그래서 너를 초청하신 거야.”

혜린은 채린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주위에 서있는 하인들에게 눈치가 보일까봐, 혜린은 궁금증과 불안감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채린은 발소리가 들려오는 이층의 곡선형 계단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이 집 주인인 듯한 사내의 모습이 혜린의 시야에 들어 왔다.

흰머리를 뒤로 넘긴 반백의 사내였다.

이마와 입가에는 굵은 주름이 움푹 패였고 세월의 연륜 만큼이나 두 눈에서는 안광이 풍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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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이층 계단에서 내려와 채린이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오자,

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로 사내의 목을 껴안고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How do you do, papa(파파, 잘 있었어요)?’

나의 딸, 채린!”

사내는 채린이 십 년 전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도망쳐왔을 당시

클라크 공군기지의 사령관이었으며 지금은 채린의 양아버지인 에디토 장군이었다.

클라크 공군기지는 1991년까지 미국 군사기지로서 미군이 철수 후,

필리핀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아

이 지역을 개발하여 필리핀 최대의 관광지로 탈바꿈시켰다.

여의도 120배 면적의 경제특구는 국제공항 및 대형리조트, 국영카지노, 미모사 골프장,

폰타나 골프, 워터파크 등 십여 개의 면세점들이 즐비한 아로요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했다.

에디토 장군은 클라크 개발지역의 총책임자로서 막대한 권한을 필리핀 정부로부터 부여받아,

그 권력을 휘둘렀으며 한국을 비롯한 일본 등 대형 건설업체들이

공사 수주를 따내기 위해서는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채린의 힘을 이용해야 했다.

사업의 수완이 빠른 채린은 군부의 권력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사업은 역시

술장사와 여자 장사라는 것을 간파하고

클라크 지역에서도 제일 유명한 월드 리조트 내에 대형 술집을 차렸다.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그곳은 크라크 지역 개발권을 따내기 위해 한국과 일본, 미국 등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건설 회사들의 실무자들과 군부의 실세들이 찾아오는 사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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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하급관리들도 채린의 입김을 통하면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채린의 위상은 하루하루 높아만 갔다.

에디토는 채린을 애지중지 아껴주는 사람이었고

채린은 자기 수익의 일부를 에디토의 정치자금으로 제공하면서 둘의 사이는

정신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하나의 몸이 되어갔다.

반백의 에디토 장군은 혜린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어설픈 한국어로,

혜린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 마미가 혜린씨 얘기 많이 했어요!”

혜린은 보조개가 살며시 보이는 미소로 에디토에게 응답했다.

혜린의 눈에는 노장군을 애마처럼 다루는 채린의 노련함과 채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노장군의 애정이 듬뿍 깃든 사랑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에디토는 혜린이 출연했던 영화나 드라마의 줄거리를 거의 다 기억할 정도로 혜린의 열렬한 팬이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혜린의 영화나 드라마가 나올 때마다

비디오로 에디토에게 보여주곤 해서 혜린의 연기에 관해서는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에디토는 자기와 친근한 필리핀 정권의 실세들의

무용담을 말해주며 혜린의 관심을 끌어보려 하였다.

이런 에디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채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혜린아! 일주일 후, 대통령궁에서 만찬이 있는데 너도 그 만찬에

참석해주었으면 하는 장군님 마음이야. 장군님께서 특별하게 부탁하시는 거니까 거절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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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이 채린의 부탁을 듣고 당황스런 모습을 보이자,

채린은 혜린의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로 소근 거렸다.

혜린아, 좋은 기회야! 우리의 만남도 그렇고니가 에디토 장군님을 만난 것도 기회야.

이런 좋은 만남을 통해 니가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놓쳐서는 안 돼!”

채린은 혜린의 승낙도 듣기 전에 에디토에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혜린이 공감한다는 의사를 보이자, 에디토는 혜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이 에디토에게 필리핀어로 무엇인가를 말하자,

에디토는 경호원을 손짓으로 불러 조용한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갑자기 경호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를 대기한 채 현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에디토는 채린과 갚은 포옹을 마친 후,

채린이 차에 오르자, 손수 차 문을 닫아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를 지켜보는 혜린의 가슴에 찡한 전율이 느껴졌다.

형형 각색 샹데리아 불빛의 광고판이 겹겹이 보이는 곳을 지나 차가 멈춰선 곳은

크라크 신 개발지역 안에 자리 잡은 월드마닐라 리조트 안의 맥심 호텔이었다.

채린과 혜린은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맥심 호텔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최고의 명품 브랜드 면세점들과 카지노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필리핀의 신흥거부들과 정권의 실세들이 즐겨 찾는 호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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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형님, 선수끼리 왜 그러십니까?

형님 위치쯤 되시면 돈 몇 푼에 큰 사고 나게 하겠습니까?

! , 형님! 오늘 이회장을 잘못 까신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 이 말이 이회장 한테 들어갈까 그게 걱정입니다요

보스는 혹을 키울 만큼 바보가 아니었기에,

수의 감정을 건드려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수야! 애들이 몇 푼 깐 모양인데 계좌번호 대라!”

보스는 늘 그래 왔듯이 사기 친 돈은 나눠먹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통이 큰 보스였다.

수는 보스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듯이,

형님 한 이억 땄다면요? 한 몫 부탁드립니다.”

계좌번호를 알려준 후, 전화를 끊어버렸다.

보스는 언제나 그래 왔듯이 구라를 하고 나면 도박판의 똥파리들이 달라붙는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도박판을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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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꽃뱀

 

신선한 풀냄새가 새벽공기를 타고 코끝을 스쳤다.

그룹에서 골프장을 인수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노회장은 언제나 자기 골프장에서 단 한 번의 홀인원을 해 본적이 없어서인지

골프장에 서기만 하면 시작부터 툴툴거리며 불만을 쏟아냈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기분이 좋은지, 아침부터 얼굴에 화기가 돌았고 마음이 들떠보였다.

30년간 노회장을 모신 김실장은 회장의 이런 기분을 놓치지 않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회장님! 오늘 무슨 좋으신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김실장은 성질이 불같은 노회장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무게로 치자면 만 톤의 배를 연상할 정도로 온갖 폼을 다 잡는 회장이다.

그렇지만 입을 삐죽거리는 버릇은 언제나 변함없는 트레이드마크였다.

, 김실장 말이 맞아, 오늘 귀중한 손님과 골프 미팅이 있어.

거 있잖아? 자네도 알지? 역삼동 혜린이 말이야!

그래! 오늘은 혜린이와 골프를 치면 잘 맞을 것 같아.

그놈의 홀인원을 한 번도 못해 봤으니 이거, 어디, 골프 마니아라고 말할 수 있겠어? 쯔쯔.”

살살이라는 별명이 붙은 김실장은 호기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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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씨는 지조가 있는 여자랍니다.

전번에 방영된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역할로 종영했고,

회장님 외에는 어울리는 사람이 없는 듯합니다.

지조하면 혜린씨 아닙니까?”

김실장은 노회장의 여성편력을 30년간 보아온 사람인지라

어떤 말이 회장의 비위를 맞춰주는 말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노회장은 연신 골프장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입구 쪽에서 빨간색 차가 골프장 안쪽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와

클럽하우스 입구에 서있는 노회장 앞에 멈추어 섰다.

차문이 열리자 스무 살 남짓한 서너 명의 앳된 여성들이 소란스럽게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 실려 있던 골프가방을 내렸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노회장의 눈가에 호기심이 역력해 보였다.

차에서 내린 혜린이 노회장 쪽으로 다가와 끼고 있던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어머! 회장님, 그동안 너무 젊어지셨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노회장은 혜린의 앙증맞은 애교에 기분이 더욱 좋아진 듯했다.

그럼, 좋은 일이 있었지.

그리고 이런 미인과 함께 라운딩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데,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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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은 그녀만의 독특한 관능적인 몸매와 미소로,

회장의 잠든 성욕의 불을 서서히 지피기 사작했다.

노회장은 젊은 아가씨들로부터 인사를 받자 우쭐한 기분으로

혜린을 앞세워 그녀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갔다.

일행 중에서도 유난히 양 볼에 보조개가 움푹 파인 앳되게 보이는

아가씨가 혜린과 노회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작은 새조개 같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생긋 웃었다.

혜린 언니, 회장님이 정말 너무 멋지시다.

그래서 언니가 행복하게 사시는 가봐!

회장님 만나서 반갑고요, 제 이름은 윤희예쁜 윤희라고 해요.

! 얘들아 너희 소개는 너희들이 각자해!”

윤희는 성격이 활발해 보였다.

아가씨들은 차례로 자기소개를 하고 가벼운 식사를 끝낸 후

일행들과 함께 필드로 걸어 나갔다.

혜린과 아가씨들의 골프 솜씨는 싱글을 넘어 프로급이었다.

한 타에 만 원짜리 내기를 걸어 벌써 노회장은 백여만 원을 잃고 있었다.

내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노회장의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노회장은 윤희에게 유독 눈독을 들이며 적당하게 오비를 내 실타를 해서

돈을 잃어주는 골프로 작업을 걸고 있다는 것을 혜린은 미음속으로 느꼈다.

혜린 자신도 몇 해 전 노회장의 노련한 수에 넘어가 동침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노회장은 재물에는 야박하기로 재계에서 소문난 사람이었고

계집들한테 뿌리는 돈도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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